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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시

[창작시] 시작법을 위한 독백 외 10편

내가 그리던 40대의 내 얼굴

 

 

<시작법을 위한 독백>

어느 들판에서였다. 그 음계가 들린 날이! 들판은 수채화처럼 禪定에 들어 수국과 아카시아와 유채꽃으로 시를 짓고 있었다. 꽃잎에 이는 바람이 따사로운 노랫가락이 되어 장단을 맞추는 낯선 풍경에 햇살이 푸드득거리며 날개짓하듯 하강하고 있었다. 바람의 운율이, 압운의 날개짓이 악보를 따라 서녘에서 저녁으로 흘러가고 있을 무렵, 전설 같이 신화 같이 들판에서 피어난 한줄기 사나이, 단아한 머리카락과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옷자락이 서늘했던 그 사나이의 어깨 위로 달빛은 시린데, 어디선가 문득 다가서는 음율이 있어 서산에 지는 저녁안개에 유독 별빛조차 선명하다. 선율이 아름다워 더딘 어느 들판에 서서 어제도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나는.

외롭고 낯선, 세계의 뒷태여.

 


<나그나로크, 신들의 황혼에 대해>

 

 

이번 생이 내게서 마지막이라면

마지막 순간은 너에게로 가겠다

저물녘 드리우는 황혼처럼

예쁜 풍경에 물들어 가겠다

태양에게도 사멸이 있다면

따스한 외투라도 걸쳐 입고 가겠다

거기서는 일년 삼백육십하고도 여남은 나날이

백야에 이는 오로라처럼 불타오르고

어둠을 머금은 전기불이 심장처럼 깜박이겠지

악당도 영웅도 전장의 무구를 내려놓고

잠시 일몰의 追悼를 노래하겠지

이번 생이 다하는 날, 가서

한줌의 빛알갱이처럼 바람의 숨결이 되어

에덴의 추억처럼 너를 보듬어 안고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가슴으로 넘어지련다

때로는 머얼리서 다다른 한줄기 별빛이

天頂의 이마를 이슬처럼 스칠테고, 그러면

너의 포근한 다리에 기대어 스르륵 잠이 들겠지

생명나무 줄기처럼 빛살 속으로 흩날리는 나를 보며

너는 또 그 무슨 기다림에 젖어들까

기약없는 기다림에 젖어들까

새로운 여정을 찾아 너란 길 위에 설까

누군가에는 순간보다도 짧은 영생의 시간이

고목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열매처럼 너에게 닿아

나라는 신비를 희망처럼 걸치고

시간이란 기적 위를 걸어선 갈까

또 누군가에게는 수억 번의 수레바퀴가 되었을 세월이

태양의 공전만큼 나이를 먹어갈 때

우리는 마치 운명처럼

푸르다는 이름을 가진 어느 별에서

아름다운 연인으로 다시 만나

황혼처럼 또 함께 늙어갈까

그때는 붉은 노을이 서쪽하늘로 흐르고

밤에 이르러 광활한 창가의 은하수가 되어

도도히 흐를 수 있을까 다시곰 너에게 닿을 수 있을까

어느 때쯤 신화가 되어버릴 우리들의 이름들과

별빛만큼 셀 수 없는 이야기의 순간이

드문드문 별자리가 되어 또는 우주의 천장이 되어

너와 내가 머무는 은하의 시로 노래되게 될 때를 즈음

그때쯤 아무것도 아닐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일 너에게로

날아서 가겠다 반짝임으로 가겠다

 


 

<고목에 피는 영생>

 

어느 핸가 하회마을을 갔을 때였다

마을 어귀에서 오래된 고목나무를 마주했다

세월을 잊고 뿌리내린 가지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스미고 있었다

걸음을 잃은 나도 한줄기 가지가 되어 뿌리를 내렸다

세월을 잊어 나이도 잊고 생명도 잊은 나무가

텅빈 그 가슴 사이에서 햇살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생은 그토록 숙성된 메마름을 끌어안고 영생에 다다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그 그루터기의 엉성한 줄기사이에서

신령의 문을 열고 시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의 숨결이 흐르고 있었다

단풍과는 다른 나뭇잎이 초목과는 다른 꽃망울이

진화의 그늘진 뒷태를 새기며 개화하고 있었다

알이 꽈악 찬 교목을 뛰어넘어 훌쩍 자란 고목에는

밑퉁이 텅텅 빈 나이테가 자라고 있었다

심장이 먿어 물줄기가 말라버린 고목의 동맥혈로

햇살을 호흡삼아 죽음 너머에만 있다는 그 전설의 숨결이 고동치고 있었다

길손은 길을 잊어버렸고 고목은 시간을 잊어버려서

소멸이란 것이 멈추어서 버린 구도를 맞이하며

투명한 빛깔의 고동소리가 숨을 쉬고 있었다

세상은 마치 풍경화처럼 느린 걸음의 기다림이 되었고

뒷걸음질쳐 온 죽음이란 녀석이 어느 고목의 그림자처럼 빛을 뿜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의 경계에 꽃핀 고목나무를 마주했다

서늘한 햇살이 드는 어느 계절날 홀로 시간여행을 갔을 때였다

 


 

<짐승의 탄생>

 

하늘이 영혼에게 다리를

허락하지 않으신 까닭은

눈물과 한숨으로 다린 탕액으로

삶이란 병을 견디며

땅 위에 용감히 그리고

숙명처럼 두 발로 디딘

이 쓰라린 영광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래서 짐승에게

발바닥을 주어

삶을 아픔으로 긁으며

기억의 빗자루로 또는

신념으로, 울타리의 밑바닥까지

쓸 수 있는

면류관을 쓰게 하였으리라

그 따가운 가시옷을 여며 입고

점자화된 세월을 지우면서

어두운 진실을 간절히

간절히 읽게 하였으리라

틀림없으리라 무수히 긁힌

기억들이 가지가지 엉키었을 때

그 눈물은 이슬처럼

찰나의 역사를 새겼을 것이고

하늘에는 닿을 수 없도록

두 다리를 주시었으리라

 


 

<짐승의 탄생 2>

 

인간은 창공을 비상하고 싶다. 그러나 인간은 두 다리를 가지고 이 땅 위를 걸어 다니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렇다면 하늘은 왜 인간에게 저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새들처럼 날개를 허락하지 않으신 것일까? 대신 인간에게는 손과 마음 그리고 머리라는 선물을 주셔서 이 땅 위를 걸으며 하나님의 세상을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도록 허락해 주신다.

우리는 수많은 세월을 자손에서 자손을 통해 유전하면서 사냥을 하고, 정착을 하고, 농사를 짓고, 나라를 세웠다. 조개를 줍던 고사리 같은 손을 써서 불을 지피고 곡식을 짓고, 집을 세우던 시절. 그 기억 너머로 전해 오는 각종 신화와 전설. 인류는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대대로 전승하며 돌도끼에서 청동칼로 다시 철제도구로 손의 역사를 타고선 온다. 그리고 마침내 마을을 이루고 도시를 일구어낸다. 그렇게 수도 없는 세월을 하늘 아래 살며, 마침내 비행기를 만들고 인공위성을 띄우고 우주선을 개발했다.

무수한 세월, 무수한 시간, 무수한 공간 그리고 무수한 역사와 기억 속에서 인류는 마침내 하늘을 날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오늘날에도 두 발로 이 땅을 걷고 있다.

 


 

<KTX>

 

푸른 비늘을 가진 이무기가 산다

여의주가 없어 슬픈 그 짐승은

하늘에 오르지 못한 우울함을 안고 철로를 유영한다

금속 옷을 걸쳐 입고는, ~

구슬픈 울음으로 바닥을 움켜잡는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닿지 않는 허공이 있다

누구의 죄이기에 이다지도 한스러운지

원한은 공간을 가르며 질주한다

목표를 잃은 두 갈래 길 위로

세월이 무상히 소멸되어 간다

하늘로 오르자 한 세상 뛰어 넘어 보자

수많은 밤과 낮을

각오와 각오로 갈아온 삶이다

보다 빠르게 보다 거칠게 혀처럼 긴 역사를

탈피와 변태로 잉태해 온 비늘을 마냥 바라다 본다

진화로 점철된 쇠가죽의 흔적

초월을 향한 담금질이 차마 그치지 못하고

지상에서의 삶을 쿵쿵쿵 흔들며 산천을 누빈다

한숨처럼 간헐적인 탄력으로 온몸을 접었다 펴며

전설은 뇌성과 벽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문명이란 올가미에 감겨 기적소리조차 까마득하지만, 그래도 기차는

천상을 오가는 희망에 젖어 원시를 추억해 본다

 


 

<경계에 서서>

 

하늘 가장 가까운 우리집 옥상

붉은 벽돌이 층계 층계 쌓여

네모난 언덕 위에 굴뚝 없는 꼭대기가 있다

석탑처럼 솟은 땅의 경계에 누워

계절 오는 소리를 듣는다

전설을 걸쳐 입은 별자리들이 바람을 밀면

나는 새가슴으로 귀를 내어건다

살갗에 닿은 소리없는 충돌들

아무런 자취가 쌓이지 않고

누구의 추억도 서리지 않은 날개짓을 한다

하늘이 부서지는 아픔을 삼키며

별과 별을 꿰어맨 상상의 바느질을 시도한다

귀를 닫고 눈을 닫고 마음조차 닫으면

하늘이 내려주는 동아줄을 타고 계절이

긴 숨결을 따라 배꼽 아래에 와 닿는다

시간이 바람의 날개짓만큼 날아가고

촉각을 잃어버린 손가락이 심장을

, 찔러오면

별빛은 깜짝 놀라 의식의 경계로 밀려난다

바람이 밤하늘 속으로 숨어 버리고

심장박동이 전깃불처럼 깜박거리면

황홀한 만남은 아쉬움을 새긴다

별빛이 실체를 살짝 내어주며, 아주 잠깐

세계가 멈추어 서는 나의 지붕에는

가끔 그렇게 은하 밖의 소식이 머물다 간다

 


 

<서정>

 

그것은 아주 오래된 밤의 기억이다

미켈란젤로가 정을 들어 마침내 바위로부터 그 오래된 영혼을 깨웠을 때 그는 땅끝 저편에서 날아와 피에타가 되었다 죽음은 그토록 애태우던 영생의 숲에 이르렀다 창세의 비늘을 벗어버린 배암, 내가 디딘 땅은 정녕 알 수 없는 세계의 뒷태로구나

세상의 끝에는 아직도 전설처럼 오래된 기억의 우물이 있고, 서정이란 이름의 괴물이 산다

 


 

<보름달>

 

보름이란

온갖 죽음이 해의 그림자를 영접하는 날

숙성된 영혼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풀벌레 우는 소리에 신화, 전설, 민담이

낙향한 손님처럼 문득 방문한다

달은 풀벌레소리를 무척 좋아했다

잡소리가 잠들면 밤공기가 퍼지는 야생의 밭

어김없이 달의 변주곡처럼 죽음이 진화한다

순수의 늪 이름하여 밤의 정신은

변화무쌍함이 살아 있는 원시의 터전

가물가물한 문명의 기억 속에

하늘로 통하는 신령한 문이 있고

어둠이, 그렇게 꽉 밤하늘을 채우면

보름달은 땅의 역사와 마주하며 성숙해 간다

 


 

<창세기>

 

1:1 하늘이시어 처음 저 민둥산을 만드실 때 무슨 생각으로 만드셨나이까

1:2 간절히 기도하던 어느 날, 문득 응답하사 가라사대

1:3 나는 곧 아무런 의도도 짓지 아니한 자라 하시더니

1:4 또 일러 가라사대

1:5 보라

      나는 의도하지 않고도 이렇게 이루는 자라 하시더라

 


 

<가을바람이 불다>

 

태양이 한 발짝 두 발짝 물러서자 비로소 바람이 가을을 머금었다

바람에 색이 있었다면 아마도 단풍보다 선명하였을 것이리라

겨울이 되면 알록달록한 염색물을 빼고 투명한 영혼으로 돌아도 갔으리라

그러나 바람에게는 빛깔이 없으므로

하늘은 생명의 걸음으로 온기를 주어, 그 가냘픈 계절에 감각을 허락하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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